현재까지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 2위의 석유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제일가는 석유 수출국이기도 하다. 게다가 세계에서 5번째로 많은 천연가스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으니, 세계 최강의 에너지 강대국으로 인정받는다. 2016년에는 34. 4조 달러에 달하는 에너지 자원을 보유하며 세계에서 3번째로 거대한 천연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주로 정부 주도, 석유 중심의 계획 경제를 경제 구조로 삼고 있으며 대략 세입의 63%를 석유에서 얻으며 수출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의 68%를 석유 수출로 벌어들이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고용자들의 80%가 모두 외국인이다. 이때문에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경제가 직면한 위기로는 점차 줄어드는 1인당 GDP, 경제 구조 다원화, 사유화 촉진, 불평등과 부정부패 해소, 교육을 통한 일자리 창출 등이 있다.
석유 산업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명목 GDP의 45%가 넘는 비율을 차지한다. 2억 6천만 배럴(4. 1×1010 m3)에 달하는 석유를 보유한 사우디아라비아는 자체적으로 세계 석유의 5분의 1을 매장하며 엄청난 양의 수입을 이에서 창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에 사우디아라비아는 급격한 인구 성장으로 인하여 석유 산업에서 난 이익이 점차 국민 1인당에게 돌아가는 양이 줄어들게 되었는데, 1981년에 석유가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 11, 700달러였던 1인당 국민 소득이 1998년에 6, 300달러 정도로 폭락했던 것이다. 2000년대 초에 다시 유가가 상승세를 타며 2007년에는 17, 000달러 수준을 회복하였으나 2014년 중반부터는 다시 지지부진한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OPEC은 유가를 조정하기 위하여 회원국들의 석유 생산량을 통제하는데,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1980년대부터 거의 변화 없이 엄청난 양의 석유를 지속적으로 뽑아올리고 있다. 다만 이와 같은 석유 정책때문에 몇몇 전문가들은 사우디아라비아가 피크 오일에 근접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석유 생산량이 필연적으로 감소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한다. 2003년부터 2013년까지, 몇몇 '핵심 산업'들이 민영화되었는데 예를 들어 수도 공급, 전기, 통신업, 교육, 교통, 복지업 등이 일부 민영화된 것이다. 이때문에 아랍 언론들에 의하면 국민들은 민영화된 사회 서비스들에 대하여 그 질이 과연 유지될 수 있을까에 대하여 심각한 의문을 품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태어난 직후부터 남녀가 부동석일 정도로 남녀구별이 엄격하여, 초등학교부터 남녀 공학 학교가 단 하나도 없는 몇 안 되는 나라이다. 교과목에도 꾸란이 포함되어 있다. 강간과 성폭력은 살인과 같은 중대 범죄로 간주되며, 실제로 사우디 법원은 성폭행을 저지른 남성을 참수한 바 있다. 그러나 이슬람교도들은 돼지고기와 술을 먹지 않지만 라마단 기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이슬람력[편집] 622년, 헤지라 이후 그 날을 이슬람교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서기 2016년은 이슬람력으로는 1437년이다 경제[편집]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기업 아람코의 본부 건물 사우디아라비아는 2018년 10월, 중동에서 가장 거대한 경제 규모를 자랑하였으며 세계에서는 18번째로 큰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다.
2005년 11월,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무역기구의 일원으로 가입하였고, 이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내 시장을 외국 자본에게 더 개방하는 내용의 협상이 진행되었다. 2000년에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 투자청(Saudi Arabian General Investment Authority)를 설립하여 외국인들의 국내 직접투자를 장려하기 위한 노력을 하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여전히도 여전히 몇몇 전기, 통신, 에너지 분야에서는 외국의 투자를 정부 차원에서 금하고 있으나, 점차 그 규제를 풀어주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한편 이와 함께 경제의 '사우디화'를 추진하여 외국인 노동자들을 자국민들로 대체하려고 시도하고도 있지만, 자국민들의 낮은 열의와 저조한 수준으로 인하여 그 성과는 그다지 높지 못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1970년대부터 '5개년 계획'을 실시하여 경제 계획을 짜고 있다. 그 계획들 중 가장 주요한 것들 중 하나가 '경제 특구'를 만드는 것인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2020년까지 완공을 목표로 한 킹 압둘라 경제 도시로, 이를 통하여 경제를 다원화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려 하였다. 2013년에는 총 4개의 경제 도시를 지으려 하였다. 국왕은 1인당 GDP를 2006년의 15, 000달러에서 2020년에는 33, 500달러로 높이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우기도 하였다.
[5]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은행으로부터 고소득 국가로 분류되었고, 인간개발지수도 높은 편을 보이고 있다. 또한 아랍 국가로는 유일하게 G20에 가입한 나라이기도 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예멘 내전 개입, 이슬람 테러리즘 후원 의혹, 특히 심각한 여성 인권 침해와 시민권 탄압, 사형제의 남용, 무신론자와 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국가적 탄압, 국가적인 인종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 샤리아법의 엄격한 적용 등으로 전세계적인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국가 GDP의 8%를 군대에 쏟아부으며, 이는 오만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치로 세계에서 3번째로 많은 양의 자금을 국방비에 투자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 무하파잣들은 또 하위 행정 구역인 '마라키즈'(مراكز)로 나누어진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행정 구역 기후[편집] 대부분의 지역은 건조 기후로 강수량이 매우 적은 사막 지대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가장 추운 달은 12~1월로, 이때의 날씨는 한국의 가을 날씨와 유사하다. 겨울철의 경우 모래바람이 불지 않아 공기가 맑고 비가 오는 날이 많다. 비가 오는 날이면 온도가 급격히 떨어져 파르와라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전통 겨울 외투가 반드시 필요하다. 계절에 무관하게 햇살이 강한 날이 많아, 선글라스·선크림이 필수적이다. 가장 더운 달은 6~7월이다. 낮의 온도는 보통 50도까지 올라가며, 햇빛으로부터 몸을 보호하지 않으면 100미터도 걸어가기 힘든 기후이다. 이때 밤의 온도는 약 27도, 일교차는 보통 16도 이상이다. 정치[편집]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에서 가장 보수적인 이슬람 국가이자 현대에 몇 남아있지 않은 완벽한 전제군주정이다.
그러나 이 두 조치 모두 이슬람 극단주의가 국내에서 더더욱 창궐하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다. 1980년대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람코의 미국 지분을 모두 사들였다. 칼리드 국왕은 1982년 6월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그 뒤를 이어 파흐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이 즉위하였다. 그는 ‘2개의 신성한 모스크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자신의 이름에 추가하였으며, 이슬람계의 반발을 받아들여 ‘전하(Majesty)’라는 호칭을 신에게만 쓸 수 있도록 하였다. 파흐드는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여전히 막대한 양의 미국제와 영국제 무기들을 사들였다.
[12] 헤자즈 왕국을 정복한 이후, 이크완들의 목표는 와하비즘의 세력들을 영국의 쿠웨이트, 이라크, 요르단 보호령 등지로 확장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점차 영국령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이븐 사우드의 급격한 반대를 일으켰는데, 이는 이븐 사우드가 영국과의 직접적인 충돌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동시에 이크완과 이슬람 과격주의 세력들은 현대화와 외국인들의 이주를 장려하는 듯한 이븐 사우드의 국내 정책에 실망하였고, 결국 이븐 사우드에게 등을 돌렸다. 허나 이들은 1929년에 결국 사빌라 전투에서 진압되었고, 지도자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1932년 9월 23일, 헤자즈 왕국과 네지드 왕국은 서로 통합되어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고,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이날을 건국기념일로 기리고 있다. 통합 이후[편집] 헤자즈 왕국과 네지드 왕국이 통합되어 새로운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 건국되기는 하였으나, 왕국은 제한된 농업과 일부 산업에만 근근히 의존하고 있던 형국이었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총 150만 명에 달하는 기독교인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모두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단기적인 직업 목적으로 기독교도들이 국내로 들어오는 것은 제한적으로 허가하고 있으나, 다만 공개적으로 믿음을 드러내거나 포교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한다. 이런 탄압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 국민들의 기독교 비율은 거의 0에 가깝다. 자국민이 만일 이슬람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을 때에는 사형이라는 극약 처방을 하기도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에는 현재 39만 명에 달하는 힌두교도들이 있는데, 대부분이 인도 계열의 외국인 노동자이다. 무신론자들도 존재는 하지만, 국가에서 거의 테러리스트 취급을 하기에 대놓고 이를 표명하지는 못한다.
2005년에 압둘라 국왕이 왕위에 오른 이후부터, 사우디아라비아 내부에서도 점차 고질적인 부정부패를 일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990년대의 국정자문회의의 창설만으로는 충분한 정치적 개혁이 되지 못하였고, 이 때문에 2003년에는 국가 차원에서 '국가 토론 포럼(National Dialogue Forum)'을 창설하여 전문가들과 지식인들이 공개적으로 국가 현안에 대하여 토론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다만 이 포럼 내부에서도 왕실의 입맛을 지나치게 거스르는 의견이나 반국가적 의견들은 매우 엄격하게 제한된다. 2005년에는 최초의 지방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2009년에는 국왕이 개혁가들을 장관 각부에 임명하고 심지어 여성을 장관직에 임명하며 획기적인 행보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만 이러한 조치들은 너무 느리거나 보여주기용이라는 비판도 여전히 나오고 있는 형국이다.
국가별 수출액, 수입액 - KOSIS 국가통계포털
1991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군대가 쿠웨이트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이라크 공습과 지상전에 모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들어, 사우디아라비아와 서방 세계와의 공조는 극단적인 이슬람계와 샤리아 동조자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점차 사우디아라비아 국적의 테러리스트들이 국내외적으로 많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오사마 빈 라덴은 1994년에 시민권을 박탈당하기 전까지 사우디아라비아 시민이었고, 2000년에 예멘의 아덴에서 미국 군함을 공격하고 2001년 9월 11일에는 뉴욕의 세계무역센터를 테러하며 국제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국민들조차, 친서방적인 외교 기조를 추구하는 정부의 입장에 딱히 동조하지는 않았다. 이슬람이 유일한 사우디아라비아의 문제점은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매우 부유한 국가이기는 하지만, 그 국부는 거의 정체되어 있으며 높은 세율과 실업율로 인하여 사회 불만이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문에 사회가 불안정해지기 시작하였으며, 자연스레 왕가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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